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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슬민꽃창 비집고 들어온 햇살만큼 파란을 겪은 ‘창경궁’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기사입력  2018/01/12 [15:06]

문화재 : 창경궁 명정전 (국보 제226호) 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문화의 날, 창덕궁 후원으로 가던 길에 창경궁을 거쳐서 가기로 하였다. 창경궁 홍화문을 들어서 옥천교를 건너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명정문에서 명정전까지, 그리고 홍화문까지 삼도가 이어져 있다.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이, 이후 성종 임금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의 변란과 순조 30년(1830)에 난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던 곳, 숙종 때 장희빈과 그 일족을 처형한 곳,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사건, 순종 3년(1909)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전각을 헐어 박물관 등을 세운 후 1911년에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면서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온 겨레의 노력으로 1987년부터 옛 모습 창경궁을 다시 찾게 되었다. 현재 대부분 건물은 순조 34년(1834)에 중건된 건물들이다. 홍화문을 시작으로 명정전(5대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 통명전, 양화당, 춘당지, 문정전, 숭문당, 함인정 등과 아직도 일제의 잔존물인 온실이 남아 있다.

▲ 창경궁 홍화문     © 정진해

옥천교 전의 홍화문은 보물 제384호로 지정된 건물로 지금도 창경궁의 정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건물을 광해군 8년(1616) 때 명정전과 명정문, 그리고 홍화문이 그때 중창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이다.

홍화문이란 이름을 가진 문은 따로 있었다. 도성을 축조하면서 4 소문 중의 하나인 숙정문과 흥인문 사이에 ‘홍화문’을 두었다. 성종 14년(1483)에 창경궁이 들어서면서 동문을 ‘홍화문’으로 하였다. 그러다 중종 6년(1511)에 창경궁의 동문과 도성의 4 소문 중의 하나인 홍화문과의 중복을 피하려고 도성의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개칭하면서 창경궁의 동문은 지금까지 홍화문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창경궁의 전각을 비롯한 옥천교 등의 이름은 당시 좌찬성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명칭들이다.

‘홍화(弘化)’라는 이름은 ‘교화, 덕화를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중층 우진각지붕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아래층 기둥 사이에는 2짝씩 널판 문을 달고 겉에 철엽을 싼 경고한 문을 달았다. 원형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의 외오포작 이출목, 내칠포작 삼출목을 짜 맞추었다. 이러한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 기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판문 위에는 홍살문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었고, 이 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우진각지붕의 용마루와 내림마루, 1층의 지붕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상도회를 하고 위에는 수기와를 얹고, 좌우에 취두로 마감하여 용마루를 완성하였다. 내림마루는 수기와장을 얹고 앞에 용두를 세웠다. 용두 앞 추녀마루는 삼장법사를 앞에 뒤고 뒤로 4개의 잡상으로 꾸몄다. 단청은 창방에 연화초 단청을 하고 평방 및 공포는 긋기단청으로 꾸몄다. 중층의 창방 아래의 판벽은 좌우로 2칸, 중앙에 3칸으로 구분하였고 칸마다 검정과 흰색으로 태극문을 그렸다.

▲ 창경궁 옥천교     © 정진해

정문을 들어서면 중문이 나오고 중문을 거쳐 정전문을 거쳐야 임금이 공식 행사를 주관하는 정전이 나오게 되어있다. 창경궁은 예외이다. 빠트릴 수 없이 등장하는 것이 정문과 중문 사이에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위에 다리가 있다. 이것이 궁궐에 꼭 있어야 할 다리이다.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갖추는 명당 수의 의미로 금천을 파고, 왕의 공간과 외부공간을 구분 짓는 상징적인 돌다리를 두었다. 경복궁에는 영제교, 창덕궁에는 금천교, 창경궁에는 옥천교, 덕수궁에는 금천교가 그것이다.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 위에 화강암 장대석으로 짜 맞춘 돌다리, 옥천교의 교상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엄지기둥을 세우고 판석을 끼워 중앙에는 한 단을 높여 어도를 만들고 오른쪽으로 문과의 길, 왼쪽이 무관의 길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그 이름을 옥천교(玉川橋)라 하였다. 물이 나가는 물길 위에 만들어진 교량이지만 이 물길이 궁이 이곳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흐르던 곳인지 아니면 풍수사상에 의해 새로운 물길을 내고 다리를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궁궐 건축은 전통 풍수지리 사상과 조선왕조의 정치적 이념으로 삼은 유교가 적절히 조화된 건축물의 배치이다. 

홍화문과 불과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옥천교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다리이다. 물줄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물길 바닥에는 사각형의 화강석을 정교하게 바닥을 덮었다. 물길 가운데에 물의 흐름을 느리게 하려고 큰 돌을 놓고 반원형의 두 홍예를 받쳤다.

▲ 창경궁 옥천교 귀면     © 정진해

두 홍예와 홍예 사이에 삼각형의 공간에 잠자리무사인 귀면을 부조한 돌을 끼우고 그 위에 무사석을 덮었다. 귀면은 말 그대로 귀(鬼) 얼굴을 나타낸 형상이다. 이빨을 드러낸 큰 입, 치켜뜬 눈, 큰 코가 특징이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어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잡귀가 애초부터 침입할 엄두를 못 내게 하려는 의도이다. 귀면을 생활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 역시 귀신이 인간의 편에서 자유자재한 초능력을 발휘하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주기를 바라는 뜻이다.

홍예의 바깥쪽에는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하부구조를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긴 댓돌을 깔아 노면을 형성하였다. 노면은 다리 양 끝을 낮게 하고, 가운데를 살짝 높게 하여 어도처럼 3부분으로 나누어 가운데 길을 약간 높였다. 다리의 길이는 9.9m이고, 폭은 6.6m이다. 다리의 좌우에는 돌난간을 설치하고, 연잎을 소재로 하여 만든 하엽동자기둥을 4개씩 세우고, 그 사이에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을 끼워 맞추었다. 풍혈판에는 돋을새김한 하엽동자기둥을 배치하고 두 개씩 안상을 새긴 마름 모양의 풍혈을 뚫었다. 난간두겁은 팔각형의 돌을 다듬어 난간을 만들었다. 난간 양 끝에는 법수라고 하는 엄지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상서로운 동물인 서수를 조각을 새겨 앞쪽에는 서로 마주 보도록 하였고 안쪽의 것은 명정문 쪽을 바라보게 하였다. 옥천교 물길 따라 좌우에는 매화나무, 살구나무와 자두나무, 앵두나무가 이른 봄부터 향기를 가득 담은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탐스러운 열매가 익어 옥천교 주변은 화원을 연상케 한다.

이는 임금은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마음을 씻으며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룰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다. 신하들은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어떻게 하여야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마음을 씻으라고 다리를 놓고 건너도록 하였다.

▲ 창경군 옥천교와 명정문     © 정진해

명정문을 통해 명정전으로 향했다. 옥천교의 3도는 명정문 계단을 넘어 명정전 월대까지 연결되어 있다. 3계로 나누어 좌우의 계단은 명정문 3문의 넓이와 같은 폭이고 중앙의 계단도 마찬가지이다. 중앙 계단 좌우에는 낮은 소맷돌로 구분 지어졌다. 명정문과 행각은 창경궁을 세울 때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가 일제에 의해 철거된 것을 1986년 복원하였다. 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다포계식으로 짜인 공포와 연등천장을 마감하였지만,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 창경궁 명정문     © 정진해

명정전과 명전문은 일직선상으로 서로 마주 보게 된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 남쪽으로 1.2m 벗어나 있다. 명정전을 둘러싼 행각과 조정 마당이 정확한 방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 옥천교에서 명정전을 바라보면 중심축이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창경궁 명정전     © 정진해

명정전 앞의 넓은 마당에는 좌우 일렬로 배열된 24개의 품계석과 어도는 명정문을 향해 열을 맞추어 있다. 명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교해 궁궐의 정전으로 작은 규모의 건축물이다. 2중의 월대를 두고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방형의 주춧돌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는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 기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뒤편에는 1단으로 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를 한 단층 팔작지붕으로 겹처마이다.

▲ 창경궁 명정전 보개천정     © 정진해

평주 위에는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낮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과 내삼출목의 공포를 얹었으며, 건물 사면에는 모두 소슬민꽃창으로 돌렸고, 그 위로는 교살창을 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 뒤편 중앙에는 용상을 두고 두 귀에 일원오악도의 병풍을 돌렸다 위에는 닫집으로 짜인 보개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 층을 접어 올린 쌍봉문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하였다. 주위는 우물반자로 천정을 짜고 모로 단청을 하였다.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 반자초 단청을 시문하였다.

▲ 창경궁 명정전 답도 봉황판석     © 정진해

행사가 있을 때 하월대는 악공 등이, 상월대는 종친 등이 배열하였다. 답도에 봉황 문양을 새긴 것은 만백성의 염원인 태평성대를 꿈꾸는 마음과 군왕 자신이 스스로 성군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답도 중앙계단 턱에 덩굴무늬가 조각하였는데 이것은 국가의 번영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정전 앞마당을 보면 24명의 문무관이 품계에 맞게 서 있고, 그 앞에 사도세자가 뜨거운 태양 아래 8일간 뒤주에 갇혀 있었던 곳, “할바마마! 아바마마를 살려 주시옵소서”라는 나직한 손자의 애원한 목소리가 들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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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12 [15:0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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