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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픈 역사가 함축된 “지지대비와 노송지대”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8/05/18 [11:04]


 
문화재 : 지지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4호), 노송지대(경기도기념물 제19호)
소재지 :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의왕시에서 수원으로 연결된 1번국도 지지대고개라고 불리는 고개를 넘으면 우측 계단을 오르면 비각 안에 비가 세워져있다. 예전에는 이 고개를 사근현이라 불렀다. 정조대왕은 1792년(정조 16) 1월 26일, 어가가 사근현(沙斤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쉴 때에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래 가슴이 막히는 병이 있어 궁궐을 나올 때에 꽤 고통스러웠었는데, 이제 다행히도 배알하는 예를 마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다소 풀리어 가슴 막히는 증세도 따라서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 지역은 바로 수원의 경계이다. 말에서 내려 머무르며 경들을 불러 보는 것은 대저 나의 행차를 지연시키려는 뜻이다.” 하고, 인하여 그 지역을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정조대왕은 1795년에 미륵현으로 부르다가, 1795년(정조 19) 윤2월 16일자 정조실록의 기록에 “매번 현륭원을 참배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에 당도할 때면 고삐를 멈추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한 채 나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하였다. 이번 행차에서 미륵현의 위쪽에 앉은 자리를 빙 둘러 대(臺)처럼 되어 있는 곳을 보고는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였다. 이 뒤로는 행행(幸行)하는 노정(路程)에 미륵현 아래에다 지지대라는 세 글자를 첨가해 넣도록 할 일을 본부(本府)와 정리소(整理所)에서 잘 알아서 하도록 하라.” 1796년에 지지현으로 고쳤다. 당시만 하여도 지지현으로 고친 후 이곳에 표석과 장승을 세웠는데, 이 표석과 장승이 현륭원 원행의 첫 번째 이정표였던 것이다. ‘한글본 뎡리의궤’에는 1796년 1월 지지대부터 원소(園所) 동구(洞口)까지 일체로 표석을 세워 지명을 새기라는 명이 있었고, ‘화성성역의궤’에는 5월에 18곳에 표석을 세웠다는 보고서를 올렸는데, 지지대고개(遲遲峴)와 지지대(遲遲臺)란 표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성지’의 기록에는 지지대는 지지현 아래 10여보 서쪽에 있으며 축대 면에 지지대를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 지지대비     


정조대왕이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할 때마다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지지대비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지지대비’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전면을 제외한 3면에는 장초석 높이만큼 사고석으로 벽을 채웠다. 그 위쪽은 살창을 둘렀고 전면에는 좌우에 판벽을 하고 가운데에 청판을 댄 살창문 두 짝을 달았다.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1807) 12월에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이다. 지대석 위에 사각의 비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의 가첨석을 올렸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 서영보가 짓고, 전판돈녕부사겸의겸부사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수원부유수겸총리사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비운의 생애를 마친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높이 150cm, 너비 60cm의 비신에 새긴 글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응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사실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비신에는 한국전쟁 당시 격전으로 탄흔이 남아있다.

정조가 아버지의 초상을 참배하고 화성에 돌아오니 비가 내려 새벽에 궁궐을 향해 가던 중 지지대에서 머물렀다는 글이 전해진다. ”이십일 일이 어느 날이던고, 와서 초상을 창배하고 젖은 이슬을 밟아보니, 어버이 사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다. 화성에 돌아와서는 비 때문에 어가를 멈추었는데, 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 마음에 맞아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새벽에 다시 길을 떠나 지지대에서 머물렀다. 구불구불 길을 가는 도중에 어버이 생각이 계속 마음에 맺히어 오랫동안 그곳을 바라보면서 일률(一律)의 시로 느낌을 기록하다“ 라는 글에서 당시의 정조마음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화성 축성에 과학적 기여가 컸던 정약용이 정조의 참배 때 함께 다녀오면서 지지대에 이르러 정조의 효심을 담은 어제 시에 화답으로 심금을 울린 글을 지었다.
‘奉和聖製遲遲臺駐韻(지지대에서 행차를 멈추며)’
”臺下靑繩路/ 遙遙直華城/ 瑞雲連野望/ 零雨會宸情/ 龍旗色/ 悠揚鳳管聲/ 戎衣如昨日/ 想像有遺氓 대 아래 푸른 실로 꾸민 임금 길/아득히 화성으로 곧게 뻗었네/상서로운 구름은 농부의 기대 맞추고/이슬비는 임금의 심정을 아는 듯/용 깃발은 바람에 펄럭거리고/의장대 피리 소리 퍼져나가네/그 당시 군대 행렬 어제 일처럼/상상하는 백성들 지금도 있어”
 
▲ 수원 노송지대     


지지대 아래에는 자동차의 행렬이 지어진다. 옛 정조의 원행은 멈춘 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그날을 지지대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지대를 넘어 옛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길에 소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있는 곳이 노송지지대이다. 지지대비에서 약 1.2km의 거리에 있는 노송지대는 자연으로 이곳에 소나무가 자란 것이 아니다. 이 소나무는 정조와 관련되어 있는 소나무로, 뒤주 속애 갇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원한을 지극한 효심으로 승화시킨 정조는 무덤을 수원 화산에다 조영하고 주변에 있는 농부들의 시름을 달래기 위해 만년제를 만들어 물을 가두어 사용토록 하고 방대한 산림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의 일부가 이곳 노송지대에 자라고 있다. 도로변에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 외에도 양버즘나무, 능수버들, 느티나무, 참나무 류가 서로 이웃되어 숲을 이루고 있다.
 
▲ 수원 노송지대     


이곳 노송지대의 나무는 정조가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시어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예부터 소나무는 상징성과 관련하여 정목, 출중목, 백장목, 군자목 등으로 불러 왔었다. 화암(花菴)의 28우(友)에서 소나무는 노우(老友)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소나무가 오래될수록 운치가 더해 간다는 의미에서 불렀다고 한다. 소나무가 우리 땅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은 약 6천년으로 보고 있다.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나무로 우리에게 친근한 수목으로 우리나라의 식생을 표징하고 있다. 정조는 지금의 노송지대에 500주의 소나무를 심게 하면서 원행을 할 때마다 소나무의 자람을 보고 늘 푸름을 잃지 않고 자라는 소나무에서 장수의 상징을 떠올랐을 것이고 점점 자라면서 장엄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소나무는 은행나무 다음으로 오래 사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흔히 송수천년(松壽千年), 송백불로(松栢不老)라고 했다. 소나무는 천세가 되는 학이 거처하는 곳이라 하였다. 그래서 학과 소나무는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상징하였다. 정조의 생각으로 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사시사철 철 따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보았을 것이다. 소나무는 줄기와 가지, 잎이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내며, 눈보라치는 역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늘 푸르고 무거운 눈을 이고서는 힘겨워하지 않고 보는 사람의 눈에 더욱 겨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소나무는 한번 베어버리면 다시 움이 나지 않는 것도 소나무로서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는 지조를 가진 나무이다. 소나무를 초목의 군자, 군자의 절개, 송죽 같은 절개, 송백의 절개 등으로 일컫는 표현은 한 결 같이 절개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설만궁학(雪滿窮壑)의 독립고송(獨立孤松)은 지절의 상징으로 시의 소재에 자주 올려졌다. 소나무는 깨끗하고 귀한 나무로서 하늘의 신들이 땅으로 내려올 때에는 높이 솟은 소나무 줄기를 택한다고 믿었다. 또한 꿈에 소나무를 보면 벼슬할 징조이고, 숲이 무성함을 보면 번창하며, 비온 뒤에 소나무가 나면 정승벼슬에 오르고, 송죽의 그림을 그리면 만사가 형통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지명 가운데 송(松)자가 들어가는 곳은 680여 곳이나 된다고 한다.
 
▲ 수원 노송지대     


정조는 능수버들을 심도록 하였다. 버드나무는 예부터 우리 조상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민속을 낳게 하고 미의식과 계절감에 적용하여 사가와 회화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버드나무를 심은 기록은 백제 무왕 35년(634) 춘삼월에 “궁궐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나 물을 끌어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버드나무는 봄을 알리는 나무이다. 버드나무는 물가 어디에서나 활착이 쉽고 잘 자란다고 하여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한 버드나무의 가지는 길고 부드럽고 윤기 나는 여인네의 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에 비유하여 유발(柳髮)이라 하며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조가 버드나무를 심게 한 것은 이승에서 아버지와 자식의 이별을 뜻하는 버드나무를 심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 수원 노송지대     


오랫동안 살아온 소나무나 버드나무 중에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약 100주 미만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는데 차량들의 매연 등으로 인하여 수세가 건전하지 못한 상태이다. 노송지대는 정조임금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픈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자연경관림이며, 효행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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