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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의 설악 천태산이 품은 ‘영국사’(1)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8/06/01 [10:38]


문화재 : 영동 영국사 삼층석탑 (보물 제533호)
            영동 영국사 원각국사비 (보물 제534호)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223호)
            영동 영국사 대웅전 (충북유형문화재 제61호)


소재지 :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산139-1번지
 

충청북도의 최남단에서 금강을 따라 펼쳐진 빼어난 경관은 호탄천을 만나고 이곳에서 천태산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넓은 주차장에 이른다. 이곳부터 걸어야 갈 수 있는 영국사(寧國寺)는 천년을 뛰어넘는 은행나무와 함께 ‘충북의 설악’이라 부르는 해발 714.7m 높이의 천태산이 품고 있다. 영국사로 오르는 동안 늘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계곡을 걷는다.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진주폭포와 삼단폭포, 삼신바위, 세월의 수만큼이나 늙어 있는 노거수, 옛 시인 묵객이 새겨 놓은 글이 절경을 이룬다. 힘들여 걷지 않아도 될 만큼의 계곡의 길은 갑자기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일주문을 만나면 앞에 영국사의 나이만큼이나 살아오고 있는 은행나무가 영국사 절간을 숨긴다. 분지의 서남쪽 동향한 기슭에 위치한 영국사는 천태산의 동쪽 사면 중턱에 해당한다. 분지의 가장자리에는 두 개의 계곡이 서로 만나 물을 합쳐 삼단폭포를 만들고 이 물이 더 큰 계곡을 만들어 흐른다.
 
▲ 영국사 계곡 삼단폭포     


영국사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천태산의 깊은 산 속 넓은 대지에 있다. 주변의 풍경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영국사는 고려 중엽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을 계승한 원각국사의 하산처가 되면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위축되었으나 명찰로서의 명맥을 유지해 왔지만 폐사 위기에 놓였으나 1934년 주봉조사의 중건에 힘입어 오늘의 영국사가 되었다. 경내에는 원각국사비와 영국사 부도, 삼층석탑, 망탑봉의 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을 비롯한 석종형부도, 원구형부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나이를 예측하기 힘든 나무의 화석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영국사 일주문     


영국사를 품고 있는 천태산은 높지 않지만, 정상에 오르는 동안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에는 ‘지륵산’이라 표기되어 있고, 산으로 둘려 있다고 해서 ‘두리산’이라고도 부른다. 영국사는 원래 ‘국청사’라고 불러왔으나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국난을 극복했다고 해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영국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천태산에서 본 영국사    


영국사의 문화재는 망탑봉의 삼층석탑에서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 일주문으로 향하다 보면 삼단폭포 이르기 전에 좌측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르면 바위 위에 올려있는 삼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망탑봉 삼층석탑으로 영국사 경내와 천태산을 본 후에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보는 것이 바른 답이 아닌가 한다. 먼저 일주문을 들어서면 분지에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의 지형에 은행나무가 영국사 전각을 막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정확히 알 수 없으니 1,000년이 넘게 보기도 하고 700년 정도를 보기도 한다. 많게는 1,200년을 보기도 한다. 정답은 없지만, 외형을 보면 1,000년 이상은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높이가 31m 정도이고 둘레가 11m로, 양산팔경 중 하나인 영동 영국사를 지키는 거대한 노거수이다. 특징은 서쪽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닿아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는데 매우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는 이 나뭇가지를 일부를 잘라 DNA 추출한 뒤에 다른 은행나무에 접목해 유전자원을 영구보존하기로 하였다.
 
▲ 영국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환경적응성이 뛰어나 우리나라 전역에서 잘 자라고 어릴 때는 성장 속도가 늦으나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면 잘 자란다. 또한, 은행나무는 암수 다른 나무이며 바람에 의해 수분이 되며, 치명적인 병충해가 없어 농약 살포를 하지 않고 재배할 수 있다. 열매의 과육 껍질에서 냄새가 많이 나는데 이것은 스스로 종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 영국사 삼층석탑     


영국사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원래 옛 절터에 부재가 흩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주봉조사가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 장대석 4, 5개씩 한 번으로 하고 석단을 구축한 위에 동향으로 세웠다. 2층 기단 윙에 3층의 탑신으로 올린 신라 식 일반 석탑이다. 지대석은 별도로 두지 않고 하층 기단 면석 하단에 굽을 둘러 통식의 각형 받침을 두었다. 면석은 4매로 맞추었고 각 면에는 3구씩 세장한 측연화(側蓮花:안상)를 새겼다. 하층 기단 갑석도 4매 석으로 결구하였는데 상면의 모서리에는 각기 합각이 표시되었고, 상단부에는 반전의 표현이 보인다. 상면 안쪽에는 4분원의 몰딩과 각형의 낮은 받침을 새겼고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 기단은 면석을 각 면에 1매씩을 세워 4매 석으로 조합하였고, 각 면에는 큼직한 측연화문을 오목새김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은 각 한 돌씩 이루어졌으며, 각 몸돌은 양 모서리에 우주가 새겨져 있고, 1층 몸돌에는 문과 주위에 장방형의 융기선 2줄로 문을 새겼다. 내면의 중앙에는 세로선을 오목새김 하여 양쪽의 문짝을 표현하였다. 상부에는 양면에 걸쳐 큼직한 자물쇠 하나를 돋을새김 하였고 그 밑으로 양쪽에 한 개씩 둥근 문고리를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은 받침이 4단씩이고 처마에는 낙수 홈이 정연하게 오목새김 되었다. 정면(頂面) 중앙에 각형으로 1단씩의 받침을 각출하여 그 위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낙수 면은 평박하고 4면의 합각이 뚜렷한데 각 귀퉁이에 곡선이 있어서 다른 탑과 비교하여 융기된 인상을 주며, 아울러 네 모서리의 전각에는 반전이 심하게 나타나 있다. 각 전각에는 중심부와 좌우 양면에 각 1개씩 모두 3개의 풍경공이 뚫어져 있다. 3층 지붕돌 윗면에는 각형 1단의 노반받침이 각출 되고 그 중심에 둥근 찰주공이 있다. 상륜부는 각각 한 돌로 된 앙화·보륜·보개와 수연 등이 남아 있으나, 노반은 없어졌다.

앙화는 방형통식으로서 하면에 각형의 받침이 있고, 상면의 가장자리에는 복엽의 입상형 앙련이 조각되고, 중앙에 찰주공이 관통되어 있는데 연판은 각 변 중앙에 1판, 네 귀에 1판씩으로 모두 8판을 배치하였다. 보륜은 일반적 양식의 원형으로서 중앙에 찰주공이 관통되어 있고, 측면에는 8판의 복엽연화문이 조식 되었는데, 각 판 내에는 장식문양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보개는 8각으로 각 처마가 유려하게 곡선을 이루었고 전각의 반전도 심하며, 그 상단에는 산형의 귀꽃이 조각되었다. 귀꽃의 상부는 곧 낙수면의 각 합각과 연결되었고, 그 상부 중앙에는 찰주공이 관통되었다. 수연은 十자로 된 각 면에 유려한 화염문이 조각되고, 정상의 중심에 찰주공이 관통되었는데 전체의 형태는 일반적인 양식을 따라 구형(球形)을 이루었다.
이 석탑은 기단과 탑신부의 석탑양식수법이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영국사 대웅전     


영국사 대웅보전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상 2구가 좌우에 있는 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삼존불의 뒷면에는 1709년(숙종 35) 작품인 영산회상도가 걸려있다. 대웅전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3단의 다듬은 돌로 아래 기단을 쌓고 위 기단은 다듬은 돌로 4단의 단을 쌓으므로 2단의 기단 중앙에 계단을 두었다. 건물을 올리기 위해 아래 기단을 두고 다시 가공된 돌을 이용하여 3단을 쌓고 중앙에 계단을 두었다. 기단 위에는 원형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3출목 7포작 건물이다. 정면의 각 칸에는 세살청판문의 4 분합문을 달았고, 건물의 좌·우측에는 한 짝의 세살청판문을 하나씩 내고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붕의 맞배부분 좌우에는 풍판을 달아 건물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원각국사탑비     


요사채와 계월암 사잇길로 오르면 비각이 보인다. 이 비각 내에 원각국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비는 고려 중기의 승려인 원각국사 덕소(德素, 1119∼1174)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선(禪)과 교(敎)의 겸수를 표방하는 고려 천태종을 창건한 원각국사는 본래 교종인 화엄종 승려였고, 그의 뒤를 이어 천태교학을 전한 교웅(敎雄)은 선종으로 출가하여 참선을 익힌 선승 출신이었다. 천태종으로 출가하여 이들이 전한 법을 전수 받아 국사에까지 오른, 입문부터 천태종 승려인 첫 인물은 창조주 대각국사의 법 증손 뻘이 되는 원각국사 덕소(德素)이다. 명종 4년(1174)에 입적하자 왕은 그의 유해를 영국사에 안치하였다.
 
▲ 원각국사탑비 귀부     


비의 형태는 거북 모양의 비 받침인 귀부 위에 비 몸을 세우고, 비 머릿돌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귀부는 전형적인 고려 시대 양식을 보인다.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거북 머리는 퇴화하여 구체적인 문양은 알 수 없고, 거북등의 6각형 무늬와 비를 끼워두는 비좌의 덩굴무늬는 생략되었다. 비 몸은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하다. 비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고, 앞면 중앙에는 '원각국사비명(圓覺國師碑銘)'이라는 전액이 양각되어 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비문을 지은 이는 한문준(韓文俊)이고, 건립연대는 고려 명종 10년(1180)이다. 글씨는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로, 당시 성행한 사경(寫經)의 영향이라고 본다. 비의 뒷면에는 원각국사 문도들의 직명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시대적 특징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 몸에 비하여 비 받침이 커서 안정감을 주는 반면, 비 머릿돌이 지나치게 커서 중압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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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01 [10:38]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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