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회·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속리산이 품은 석조물 문화유산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8/12/28 [10:45]


문화재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 (보물 제1416호, 제1418호)
           보은 속리산 금강골 쌍탑(충북유형문화재 제200호)
           보은 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문화재자료 제79호)
           보은 순조 태실(충북유형문화재 제11호)
소재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속리산은 <삼국사기> 제사지에 의하면, 신라 시대에 전국의 명산대천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중사를 올리던 주요 명산의 하나로, 일찍이 신라 시대부터 속리악이라 불리어 왔다. 명산인 만큼 예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산이다. 사람이 왕래함으로써 무엇인가 자연 속에 남기려 했던 것이 지금의 석조물 문화재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산에서 문화재를 찾아간다는 것은 길이 있어야 하지만, 속리산의 금강골 쌍탑이나 순조 태실을 찾아가는 것은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면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법주사를 지나 세조길에 접어들면 속리산 정상을 향하는 길이 시작된다.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달천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세심정에 이른다. 이곳에서 문장대방향과 신선대방향으로 갈림길에 서면 먼저 문장대방향의 복천암을 갔다가 다시 뒤돌아 신선대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세심정에서 복천암까지는 약 50m 거리다.
복천암은 720년 신라 성덕왕 19년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이 극락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내렸고, 조선 세조가 1464년에 길목의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낫자 이 절을 중수하도록 ‘만년보력’이라는 사각옥판을 내렸다. 임진왜란 때 극락전이 불에 탄 것을 중수하여 공민왕의 친필인 무량수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과 학조화상탑(보물 제1418호)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 수암화상탑     


수암화상탑은 학조화상탑과 꼭 같아 보이나 지붕돌이 학조화상탑에 비해 간략한 편이며, 세부 수법은 두 탑이 비슷하다. 이 탑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탑신에 ‘秀庵和尙塔(수암화상탑)’이라 새겼고, 중대석에 ‘成化十六年 八月日立(성화십육년팔월일립)’이라고 2행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탑의 주인이 조선 초기의 고승  수암화상이라는 것과 조성연대가 성종 11년(1480)임을 알게 하는 점이다. 탑의 양식은 고려 시대 팔각원당형을 계승한 조선 초기의 탑으로서 조형수법이 뛰어나다. 8각의 지면에 8각의 석조물로 태를 두르고, 그 중앙에 8각의 하대석과 8각의 받침석 1단을 두고 9각의 중대석을 그 위에 올렸다. 8각의 상대석은 기울기를 달리한 면을 두었으며, 그 위에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원당형이며, 지붕돌은 경사가 가파르고 그 위에 보수를 올렸다.
 
▲ 학조화상탑     


학조화상탑은 팔각 중대석 두 면에 걸쳐 '正德九年甲戌五月日立(정덕구년갑술오월일립)‘과'學祖燈谷和尙塔(학조등곡화상탑)이라 새겨 조선 중종 9년(1514)에 건립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주인공의 승탑은 직지사에도 세워졌다. 주인공 학조화상은 성종 19년(1488)에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였고, 연산군 6년(1500)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세가자제 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 전기에 많은 업적을 남긴 고승이다. 탑은 8각의 지면에 8각의 석조물로 테를 두르고 그 중앙에 팔각의 하대석과 8각의 받침석 1단을 두고 8각의 중대석을 그 위에 올렸다. 8각의 상대석은 3단의 기울기를 달리한 면을 두었으며, 그 위에 원당형의 탑신은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았고 곱게 다듬어서 면과 곡선이 부드럽고 정연하다. 지붕돌은 하면 중앙부의 탑신부에 놓이는 부분에 원형의 몰딩이 있고, 상면은 상단부에서 약간 급경사를 보이나 중간부터는 완만해졌다. 낙수면은 모서리마다 합각의 머리가 굵게 표현되었으며, 전각마다 귀꽃이 하나씩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낮은 호형의 원좌(圓座) 위에 굵직한 원대(圓臺)를 마련하고 그 위에 1단의 낮은 호형의 원좌를 마련한 뒤 그 위에 보주를 양각하였다.
 
▲ 금강골 쌍탑     


복천암에서 다시 세심정으로 내려와 신선대방향의 금강골에 이르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쌍탑(충북유형문화재 제200호)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오랜 옛적에 다녔던 길은 조릿대와 나무들로부터 그 흔적을 감추었고 다시 조릿대를 헤치고 가다 보면 희미하게 나무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쌍탑이 꼭 같은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다. 쌍탑이 있는 곳과 옛 암자 터는 떨어져 있는데, 숲을 헤치고 나면 깎아지른 경사길이 있고 한 발짝을 내딛기도 어려운 건너편에 고려 시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옛 암자 터가 기왓장 파편으로 확인이 된다.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동남쪽 약 50m 아래에 옛 암자 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암자는 마당에 탑을 세우지 않고 계곡을 건너 높은 곳에 그 터를 잡고 두 기의 석탑을 가지런히 세웠다. 암자의 문을 열면 바로 쌍탑이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암자 터에는 주초 석이 남아 있고 기와 조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기와에 새겨진 문양은 고려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로 보였다. 아직 어떤 암자이고 어떤 연유로 흔적을 감추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어 아쉬움은 있지만, 한 쌍의 석탑에서 고려 시대 불탑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같은 양식의 불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이다. 동탑은 원래의 돌을 깎아 지대석을 만들고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고려 시대의 석탑이다. 아래층 기단은 위층 기단과 비교하면 높이가 낮으며,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고 그사이의 면석에 안쪽으로 연꽃을 측면에서 본 연화문을 새겼다. 위층의 기단석에도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고 1단의 받침석을 두었으며, 탑신석을 받치는 받침석은 2단의 받침을 두었다. 1층, 2층, 3층의 몸돌은 크기가 서로 다르며, 각각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치켜 올라갔으며, 지붕돌받침은 각각 4, 4, 3단을 두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지고 3층 옥개석과 하나의 돌로 구성된 노반만 남아 있다. 서탑은 2, 3층 지붕돌의 네 귀가 많이 파손되었다. 동서 쌍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97년에 복원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습이 똑같은 완전한 쌍둥이 탑이다.

금강골 쌍탑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가 신선봉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상고암으로 가는 숲길이 나타난다. 등산길을 걷는다고 생각하고 걷다 보면, 신라 성덕왕 19년(720) 법주사를 짓기 위해 목재를 저장하여두던 창고로 이용되다가 비로봉을 중심으로 자모성을 구축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다는 상고암에 이른다. 이 암자는 조선 고종 13년(1876)에 중창하고, 1897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폐사되었다. 1963년 옛터에 법당을 마련하고 뒤이어 극락보전, 영산전, 산신각, 남북통일기원탑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속리산 내에는 상고(上庫) 중고(中庫), 하고(下庫)의 삼고(三庫)가 있었는데 중고암과 하고암은 약 70년 전에 폐허가 되어 사라지고 상고만이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가 되었다.
 
▲ 상고암 마애불상군     


상고암 극락전 맞은편에 서향으로 자리한 자연 암벽에 6구의 마애불이 상, 하 2단으로 마애불상군으로 조각되어 있다. 조각 시기는 명문이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상고암 주변에 조선 시대의 기와조각이 다수 있고 바위 표면에 돌이끼가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성연대를 약 100년으로 보고 있다. 하단에는 4구의 사천왕이 배치되었는데 왼쪽으로 각각 칼과 보탑, 용, 방망이, 비파를 들고 있다. 그 오른쪽에는 양손을 가슴에 합장하고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좌상이 조각되었다. 이 상의 머리는 민머리이며, 그 위로 화염처럼 타오르는 모습의 화관이 장식되어 있다. 상단에는 이들 마애불상군 가운데 좌상을 한 불상이 있는데, 머리에는 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양손에는 긴 줄기 끝에 연꽃봉우리가 달린 꽃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된다.
 
▲ 순조태실     


속리산 내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조선 제23대 순조의 태를 묻은 태실로 가는 길은 다시 세심정의 맷돌 앞까지 내려가서 우측의 희미한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난다. 세심정에서 보면 남쪽의 높은 절벽 위에 태실이 있는 곳이다. 길이 없는 절벽에 밧줄 하나로 어렵게 올라서야 태실을 볼 수 있다. 밧줄을 잡고 올라서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이곳까지 석물을 올릴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을 하게 된다.
 
▲ 순조태실 귀부     


조선 시대에는 사람의 태가 그 주인공의 길흉을 좌우한다고 해서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태장경의 영향을 받아 길지를 찾아 태를 안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궁중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사흘째 되는 날 물과 술인 향온주로 태를 세척하고 출생의례에 따라 태실을 조성하고, 후에 보위에 오르면 그 위용을 더하기 위하여 다시 석물로 가봉(加封)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순조의 태실은 왕위에 오른 후 1806년(순조 6)에 석물을 가봉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이를 기념하는 의미로 보은현(報恩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1928년 조선총독부는 태항아리를 꺼내 창경궁에 설립된 이왕가박물관에 옮겨가면서 태실은 훼손되었고, 태항아리는 지금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태실은 1928년에 서삼릉으로 이전되어 있다. 서삼릉에는 현재 조선 왕실 태실 54기가 묻혔다.
 
▲ 순조태실비     


태실은 중앙에 사각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구형의 중동석을 놓은 다음 보주가 조각된 팔각의 지붕돌을 얹어 석실을 만들고 주위에 바닥돌과 호석난간을 설치한 팔각원당형이다. 태실 앞에는 귀부와 이수를 갖춘 태실비가 있으며 앞면에는 ‘主上殿下胎室(주상전하태실)’이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 순조태실 중동석과 지붕돌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8/12/28 [10:45]  최종편집: ⓒ wngo
저작권자(c)한국엔지오신문.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