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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속리산 법주사의 문화재 (1)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9/01/25 [10:02]

 문화재 : 보은 법주사 철솥(보물 제1413호), 법주사 사천왕문(충북유형문화재 제46호)

            보은 속리산사실기비(충북 유형문화재 제167호), 법주사 벽암대사비(충북유형문화재 제71호)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사내리)

 

 

정이품송을 지나 법주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일주문을 만난다. 양 측면에 기둥 하나씩으로 짜인 건물로 정면 한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의 경내가 시작됨을 알리고 사찰의 경계임을 표시하고 일심을 상징한다.

 

▲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    



각 부재를 싸고 있는 화려한 단청과 정면 평방에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이라는 현판과 후면 평방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는 현판이 걸렸다. 천정의 단청은 두 마리의 학이 구름 속을 날고 있다. 학은 흰색의 몸통과 검은색 머리 때문에 깨끗하고 고귀한 것을 상징한다. 세속의 온갖 번뇌로 들끓는 어지러운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오로지 진리에 귀의하는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세간의 알음알이로 해석하려 하지 말라.

 

▲ 수정봉 거북바위    



법주사 일주문을 들어선다는 것은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딛는다는 의미이다. 속리산 문장대에서 남서쪽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온 곳에 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는 곳이 수정봉인데, 법주사는 수정봉 아래 달천을 끼고 펼쳐진 너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의상 조사가 창건하고 진표율사가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진표율사는 금강산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에 살던 염심, 융종, 불타 등이 진표율사를 찾아오자 그는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교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절을 짓고 길상사라 하였다. 이후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법주사라 이름 붙어진 이후 성덕왕 9년(720)에 중건되었다.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중창을 거듭하였으나 조선 시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벽암 선사에 의해 중창되어 지금의 법주사의 발판이 되었다.

 

▲ 속리산 사실기비    



문장대로 향하는 세조길과 법주사로 들어서는 삼거리에서 수정교 방향 좌측에 비각과 한 기의 비가 세워져 있다. 비각은 속리산 사실기비(충북 유형문화재 제167호) 한 기가 세워져 있고, 앞쪽에는 벽암대사비(충북 유형문화재 제71호)가 세워져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666년(현종 7)에 송시열이 글을 짓고 명필 송준길이 글씨를 써 세운 비이다. 속리산 수정봉(556m)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내용이다. 수정봉 정상의 흙이 붉은데, 그 까닭은 정상에 천연으로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언젠가 중국의 술객(術客)이 와서 거북의 머리가 중국이 있는 서쪽을 향하여 번쩍 쳐들려 있는 형상임을 보고, 중국의 재화(財貨)를 모두 실어 내갈 영물(靈物)이라고 하면서, 거북바위의 머리를 깨뜨리고 등 위에 10층 탑을 세워 기운을 진압했다. 그때 거북이가 흘린 피 때문에 흙이 붉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1653년(효종 4) 옥천군수 이두량(李斗梁)은 다시 거북의 머리를 붙이고, 1665년 충청병사 민진익(閔震益)은 탑을 부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미신적 행위로 경계한 내용이다.


사실기비 좌측 앞에는 별도의 구획 내에 동서에 각각 다른 2개의 비가 있는데, 지붕돌을 올린 비는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고, 비신의 상부가 둥글게 처리한 원수 모양의 비는 ‘봉교금유객제잡역비(奉敎禁遊客除雜役碑)’라고 새겨져 있다.

 

▲ 벽암대사비    



벽암대사비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 시대 중기의 고승 벽암 대사(1575~1660년)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벽암은 보은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출전하여 호남지방에서 활동했으며, 인조 때에 팔도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인조 2년(1624)에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승군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은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천 명을 모은 후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화엄사와 쌍계사를 중수하는 등 거듭된 전란으로 피해를 본 사찰들을 복구하는 데 기여하였다. 비는 현종 5년(1664) 5월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정두경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세웠으며 규모는 높이 213㎝, 폭 110㎝, 두께 35㎝이다. 그의 벽암당부도(전북 문화재자료 제144호)는 완주 송광사에 있다.

 

▲ 봉교금유객제잡역비    



봉교금유객제잡역비(奉敎禁遊客除雜役碑)는 1851년에 왕명에 의해 속리산에 들어와 놀지 말고 승려들에게는 함부로 잡역(부역)을 시키지 말라고 왕이 비변사를 통해 내린 명령을 이 비를 통해 알린 것이다. 그만큼 속리산의 법주사는 위엄 있는 사찰로 일종의 금표의 역할을 한 셈이다.


벽암 대시비 앞에서 법주사로 들어가기 위해 수정교를 건너야 한다. 수정교의 이름은 수정봉에서 유래되었으며, 다리 아래에 흐르는 수정같이 맑은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이 맑은 물은 남한강에 섞여 들어가는 달천의 최상류이다. 달천은 서북진하여 산외면으로, 서남진하여 내북면을 지나 성주시 미원면에 접어들어 갑천과 합쳐지고 다시 동북 방향으로 길을 바꿔 괴산군 청천면으로 넘어가 속리산 북쪽에서 흘러온 화양9곡을 거친 화양천 물을 품는다. 북동진한 물은 칠성면 외사리를 지나 연풍에서 흘러들어온 쌍천을 품고, 북진을 거듭하여 괴산읍 동쪽에서 동진천을, 불정면에서 음성천을 더해 탄금대교 아래서 남한강 줄기에 편입된다.


수정교를 건너면 우측에 돌기둥 하나가 서 있다. 사각기둥이지만 모서리를 둥글게 모를 죽이고 위쪽에 두 줄을 파서 모양을 냈다. 안쪽에 얕게 패인 홈도 있지만, 어떤 용도로 쓰였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석주 옆에는 자그마한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남석교를 세웠는데, 이 다리를 놓기 위해 물질로 시주한 사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듯하다. 비의 전면에는 강희28년기사십월일립(康熙28年己巳十月日立) 전주지삼주(前住持三周) 화주김수남(化主金受男) 건릉15년경오오월일개조(乾陵15年庚午五月日改造) 시주지가선입하(時住持嘉善笠河)라고 각자 되었다. 강희28년(숙종 15년 을사년 1689년) 시월에 비석을 세웠다. 건릉 15(영조 26년 경오년, 1750년)에 비석을 다시 세운다는 각자를 새겼다.

 

▲ 법주사 금강문    



수정교를 건너서면 앞에 금강문부터 경내가 시작된다. 금강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담장이 둘러 있다.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좌우에 풍판을 달았다. 중앙 어칸은 통로로 이용하고 양쪽 어칸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 법주사 철솥    



금강문을 들어서 우측에 사모각 건물 내에 큰 사발(大鉢) 모양의 철솥이 있다. 높이가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조각사 뒤 냇가에 인접해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언제 제작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법주사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주철로 주조된 대형 주물 솥이면서 완벽한 조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희소성 등에서 가치가 큰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논산 개태사 철확과 청주 관음사 철확이 있다.
솥의 몸체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구연이 직선으로 외반되어 마치 모자를 뒤집어 놓은 것과도 같은 이 철솥은 크기가 하도 커서 한꺼번에 승려 3,000명이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려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기도 했다고 전해 오기도 한다.

 

▲ 법주사 사천왕문 및 전나무    



금강문을 들어서면 앞에 두 그루의 전나무가 나란히 같은 크기로 자라고 있다. 사찰에 다른 나무에 비해 전나무가 많이 자라는 것은 법주사뿐만 아니다. 월정사, 내소사, 해인사, 청도의 운문사 등지에도 전나무가 많이 자란다. 그 이유는 절을 고쳐 지을 때 기둥으로 쓰기 위해 심은 것이다. 웅장한 사찰 건물을 지을 때는 전나무만 한 장대재인 나무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보관 건물인 수다라장, 양산 통도사, 강진 무위사의 기둥 일부가 전나무로 만들어졌다. 법주사의 천왕문 앞의 두 그루의 전나무는 어떤 목적으로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같은 날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의 사천왕문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다. 몇 차례 고쳐지으면서 조선 인조 2년(1624) 벽암 대사가 중창을 하기  전까지 몇 차례 다시 지었다.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시는 곳으로,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이다.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 들이다.

 

▲ 법주사 사천왕상    



장대석으로 2단을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좌우에 풍판을 달았다. 중앙 어칸은 통로로 이용하고 좌우 2칸씩은 사천왕을 2구씩 배치하였다. 정면의 벽은 판벽을 하였다. 사천왕은 1624년에 흙으로 빚어 만든 것으로 높이가 약 5.7m에 이를 정도의 대형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걸작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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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25 [10:02]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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