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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계기 침범,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통해 일본에 대한 경각심 높여야”
 
박재국(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9/02/07 [01:42]

박재국(칼럼니스트)

 

 

 

 

최근 일본 초계기의 불법 침입으로 한일 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진일보한 인식과 진정한 사과는 고사하고, ‘평화헌법’을 내팽개치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변신한 일본의 안하무인격 행태는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수많은 지식인, 역사학자 등이 그랬던 것처럼 필자도 20여 년 전부터 이미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는 일본의 망발에 대해 칼럼 등을 통해 비판해왔으나 일본은 그야말로 마이동풍이다. ‘과거(역사)를 잃어버린 자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는 아랑곳하지 않는 일본의 뻔뻔한 모습을 보며 뭔가 일본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다. 

 

지난해 년 말, 일본이 의도적으로 도발한 한국 함정에 대한 초계기 위협사태는 북미정상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는 정반대로 한반도 평화무드에 재를 뿌리며 오기를 부리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일본은 초계기 사건과 독도영유권 문제를 국제적 동조를 받거나 심지어 필요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뜻을 내비치는 등 마치 해적처럼 평화의 바다를 분탕질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의 진보 성향 ‘명동향린교회’에서 최천택 교수는 일본은 삼국시대 이후 한일합방까지 728 차례나 한국을 침략한 대원수국이고, 미국은 건국 200여 년에 세계 34개 국가를 침략해 속국화하거나 살생행위 등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바 있다.

 

필자는 여기서 잊혀진 역사를 반추하여 ‘우키시마호’ 사건을 상기하고자 한다. 국민들에게 그리 많이 알려진 사건은 아니면서도 한일 간 과거사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이 사건을 되새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역사에 대한 외경심을 내팽개친 일본의 잔인무도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1937년에 4,730톤에 길이가 108미터로 건조된 후,1941년 2차대전 중, 일본에 전쟁용으로 징발되어 해군이 관리하고 있던 ‘우키시마호’는 일제 강압으로 국권을 상실한 후, 약 20여만 명의 우리 국민이 강제로 징발되어 절반은 혹사로 사망했고, 나머지 10여만 명은 해방 후, 귀국하게 된 시점에서 2만여 명의 한국인 노무자들을 부산으로 송환하게 된다.


1945년 8월, 한국인 노무자와 일본군 수백 명 등 약 7천여 명을 태우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항을 출항, 부산항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도중 24일, 돌연 방향을 틀어 교토부 마이즈루 항으로 기항하는 중에 원인모를 폭발과 함께 침몰하면서 수천 명이 실종,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사고 당시 한국인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사망자가 5천 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있으며, 일본 해군은 침몰 직전 어떤 신호와 함께 바다로 뛰어 내려 생존자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승선 인원과 관련, 최대 8천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일본 외무성 기록으로 2014년에 공개된바 있으며, 2016년에는 이 배에 폭발물이 실린 정황을 기록한 일본 방위청 문건도 드러났다. 

 

일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훗날 오미나토 해군 공작부조기과에 근무하던 보일러공이 폭침되기 전 “이 배 기관실 옆 창고에 폭탄 자폭 장치를 설치해 놓았다”고 폭로했으며, 해군 승무원들은 양주에 모두 취해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9년 후인 1953년에 일본은 ‘우키시마호’를 다이나 마이트 로 폭파시켜 인양함으로써 증거인멸은 물론 선박에 남아 있을 사망자들에 대한 신원 파악도 불가능하게 한 점 외에도 선체 벽 부분의 철판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진 것은 내부 폭발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정황 증거이다.

 

이와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은 1992년 일본 법원에 국가의 배상청구 소송을 제소한 결과,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한편 당시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87명 중, 생존자는 현재 9명 내외로 전해지고 있다.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북이 빨리 만나서 대책을 강구해야 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하며, 1965년 한일 협정 때 이 문제들을 거론조차 안 한 이유도 밝혀야 한다.
 
또한, 박정희, 김종필을 소급 문책해야 한다. 1965년 한일회담 때 김종필은 일본으로부터 6천6백만 달러를 커미션으로 받았다. 이는 18년 전 한겨레신문에도 대서특필된 바 있다.

 

한일 회담의 원흉이며 일본군 장교이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3년 전 일본과 ‘제2의 을사보호조약’인 한일군사보호협정을 체결하였고, 단돈 1백억 원으로 정신대 문제를 끝냈으며, 소녀상까지도 철거키로 했다.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엊그제 김복동 할머니가 93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이제 정신대 희생자는 스물세 분밖에 안 남았다. 향후 일본은 한미, 한일 간의 동맹을 명분으로 한국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음을 잊지 말고 일본의 음흉한 수작을 분쇄해야 한다. 한일군사보호협정도 폐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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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07 [01:42]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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