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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명이 3년에 걸쳐 축성한 신라의 성(城)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9/03/29 [11:14]

 문화재 : 보은 삼년산성 (사적 제235호)
소재지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주1길 104 (어암리)


산성이 전 시기를 통하여 기본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요소는 성곽과 성내의 방어시설이다. 성벽이 축성되는 입지는 시대에 따라 다르고 성을 축성하는 재료와 축성 방법도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일정한 영역을 포괄하는 구조물을 조성하여 내부를 보호하기 위한 성벽이 구축되었다. 특히 신라의 성은 백제성이나 고구려성과는 달리 해발고도가 100~300m 정도인 전망이 좋고 험고하지 않은 산정에 축성한 것이 대부분이다. 주장성과 같이 해발 500m가 넘는 곳에 축성한 예도 있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평지성도 있지만 그래도 신라성의 주류는 역시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성은 둘레 1km 내외의 것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방사상으로 분포되었는데, 이것은 군사적 기능과 주ㆍ군ㆍ현의 치소성으로서 행정적인 기능까지 겸비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산성중에 특히 보은군의 삼년산성은 신라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 보은 삼년산성 서문지    



보은읍과 장안면 탄부면의 경계를 이루는 망루 같은 오정산(烏頂山)에 포곡형으로 축성된 성이다. 작은 돌을 포개고 끼우면서 쌓아 올린 성벽을 보면 엄청난 인력이 필요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능선을 따라 축성된 성은 문지가 4개소, 우물터가 5개소, 수구지 등을 갖춘 성으로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축성되고 소지마립간 8년(486)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 장정 3천 명을 동원해 대규모 개축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 시대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동국여지승람>과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烏頂山城)으로 되어 있다. 오항(項)산성과 오정(頂)산성은 기록상의 착오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은 신라 진흥왕이 출병하여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였다고 한다. 삼국통일 전쟁 때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하였고, 통일신라 헌덕왕 때는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이 삼년산성에 진을 친 신라군에게 패해 진압됐다. 918년(태조 1) 왕건(王建)이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이용된 기록이 있다.

 

▲ 보은 삼년산성 석각    



산성의 위치는 상주와 청주, 대전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있어 백두대간을 통과하는 중요한 교통로 중 한 곳이다. 삼국이 한강 유역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백제 도읍이었던 공주와 부여를 직접 공략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길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국력이 가장 약했던 신라는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견제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신라는 백제와의 국경선에 이 성을 공들여 쌓았다. 그만큼 보은 지역은 전략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14개의 성이 포진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1,600여기에 이르는 많은 고분이 남아 있어, 당시 신라가 이곳을 상당히 중요시했음을 짐작된다.
포곡식 산성은 총 길이가 1,680m로 납작한 돌을 차곡차곡 쌓았다. 삼국시대에 축성한 영월의 정량산성이나 단양의 온달산성과 같이 고구려의 석성과 매우 유사하지만, 신라 고유의 축성방식이 묻어나는 성이다. 현재의 성의 높이는 평균 15m에 이르고 최고의 높이는 22m, 폭은 8~10m에 이른다. 한국의 많은 성벽 중에 가장 높고 가장 넓은 폭을 가진 성이다. 납작한 돌을 우물 정 '井'자 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로 놓으면 그 위에 세로로 쌓았다. 거의 수직으로 축성한 성벽이 단단하지 않을 수 없다. 성벽 모퉁이의 하중을 견고하기 위해 4중의 계단식으로 쌓은 부분도 있다.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안으로 흙을 다져서 쌓고, 바깥쪽은 돌로 쌓은 내탁과 외축의 방법을 택하였다. 남쪽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쌓은 내외협축 방법을 택하였다. 서문을 제외한 동문과 북문, 남문은 좁은 계곡에 성벽을 높게 쌓은 현문식으로 쌓아 사다리를 이용하여 출입했다. 특히 동문은 문을 'ㄹ'자로 배치하여 적으로부터 쉽게 뚫을 수 없도록 하였다.

 

▲ 보은 삼년산성 서벽    



서문지는 산성의 대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지 중에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며 좌우의 성벽이 안쪽으로 휘어져 있다.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낀 지점의 북쪽 경사면에 바짝 붙어 있어 성 밖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서문지 좌의 성벽에서 약간 위쪽에 치성이 배치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80년대 보은 지역 대홍수 때 서문으로 흘러내리는 수해로 1차 문지로 추정되는 석재가 노출되어 이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서문은 2단계로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차 문지는 전체 길이가 225cm, 폭 422cm의 규모로 기둥 홈과 문설주 홈, 문확 홈이 파인 신방석임을 확인하여 현재 노출되어 있다. 또한 발굴과정에서 마차 바퀴 마멸 흔적이 폭 166cm가 발견되어 이곳이 출입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차 문지의 석재는 1차 문지와 같은 형식이지만, 수해로 신방석의 위치가 바뀌어 문구부의 정확한 규모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문지에서 성안 계단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1971년부터 복원한 서문 좌우의 성벽과 치성이 있다. 이곳만 복원하게 된 이유는 1970년 초에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보은을 시찰하다 성곽의 윤곽을 보고 "저게 뭐냐"고 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71년부터 서둘러 복원을 시작하였는데, 복원된 석재가 원래의 석재와 완전 다른 것이며, 축성 방법도 신라의 방법이 아닌 현대판 축성 방법으로 쌓음으로써 원형대로 복원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성을 쌓기 위해 이곳에서 약 4km 떨어진 지금의 탄부면 삼장리에서 돌을 가져와 쌓았다. 그래서 과거의 신라인이 쌓은 축성법과 대한민국 시대에 쌓은 축성법이 완전히 다르고, 돌도 다르고 색깔도 달라서 한때는 보은 사람들이 산성을 보면 너무 눈이 부셔 운전을 할 수 없다는 항의도 있었다고 한다.

 

▲ 보은 삼년산성 북문지    



서쪽성벽에서 동쪽으로 휘어지면서 북쪽의 들과 산이 모두 조망되는 곳으로 신라 병사들은 이 높은 곳을 망대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주변이 확 트여 있다. 다시 성은 계곡으로 내려가면서 북문지가 자리하고 있다.

 

▲ 보은 삼년산성 북벽    



북문지는 성문 밖으로 치성으로 보이는 차단벽이 있는데 북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발굴조사에서 치성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현재의 북문지는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지 안쪽에 바깥의 치성 높이와 같은 높이의 석재를 쌓았고 치성 위에는 초석으로 보이는 4개의 석재가 있으며, 발굴 조사에서 정면 5~6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문지에서 다시 성벽은 잘 남아 있으면서 바깥으로 무너져 정상에 이르고 있다. 정상의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동쪽 바깥 성벽은 다른 구간에 비해 잘 남아 있으며 동문까지는 평지에 가까운 지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 보은 삼년산성 동문지    



동문지는 산성에서 가장 긴 동쪽 성벽의 중앙 부분에 있으며, 이곳에는 동문 주변의 성내 물이 빠질 수 있는 수구도 있다. 동문지의 원래 모습은 성벽의 안쪽 약 절반 정도가 다른 곳보다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고 ‘ㄹ’자형으로 돌아야만 통행이 가능한 형태이다. 두 차례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동문지는 서너 차례 수축하고 개축하였으며 ‘ㄹ’형 구조는 후대에 문지 조성 과정에서 축조된 구조물로 밝혀졌다. 발굴 조사 결과, 동문지 인접 성벽 위쪽에서는 삼국시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이 발견되었고, 안쪽의 평평한 곳에서는 방아확, 돼지 모양의 기와 조각, 목제 망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 보은 삼년산성 동벽 치성    



동문에서 남문 방향은 다시 오르막으로 내성의 벽은 높으며 정상 부분으로 갈수록 무너져 있다. 남쪽의 성벽도 일부분은 무너지고 원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곳에서 보는 동쪽 지역인 보은읍 어암리, 대야리, 성주리, 길상리, 풍취리, 강신리와 탄부면 평각리에 고분이 1,644기가 분포하고 있다고 소개되고 있다.

 

▲ 보은 삼년산성 남문지    



남문지는 남쪽 성벽 서쪽 끝에 위치한다.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된 성 위에서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축성한 치성이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며 서쪽 성벽과 연결된다. 문밖으로는 작은 계곡부가 있으며 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양쪽의 능선부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반원형 치성이 설치되어 있어 남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보은 삼년산성 남벽    

 

문지의 규모는 너비 3.6m, 길이 10.8m이고 높이는 서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약 5m, 동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9m에 이른다. 문의 형식은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으로 두세 차례 개축하다가 결국에는 문 입구를 폐쇄하였으며, 남문지 부근의 성벽도 두세 차례 개축했다.

 

▲ 삼년산성 성내 습지    



우물터는 아미지(蛾眉池)라는 연못을 비롯하여 5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서문지 안쪽 연못 맞은편 암석 지대에 새겨진 글이 있는데, 아래쪽에는 아미지(蛾眉池), 윗부분에는 유사암(有似巖)과 옥필(玉筆), 그리고 보은사 쪽 앞 벽에 남술(南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이 글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신라성인 삼년산성의 특징은 사다리를 놓아야 올라갈 수 있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이 주를 이루며,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기저부에 덧붙여서 성벽을 쌓은 보축시설을 두었다. 또한 인접 지역에 고분군이 조성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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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29 [11:14]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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