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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 1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9/07/19 [10:21]

문화재 : 문경새재(명승 제32호)     
소재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1156, 등 (상초리)

 

인류가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험하지 않고 쉽고 짧은 시간에 목표지점에 도착하기 위해 자신만이 다닐 수 있는 흔적을 남기려 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길이다. 인간이 이룩해 놓은 여러 문명요소 가운데 길이 가장 위대한 업적이 아닌가 한다. 그다음 냇가의 돌을 이용하여 징검다리나 나무를 이용한 구름다리를 놓은 것일 것이다. 길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되면서 새로운 길이 다시 만들어지고 미지의 땅까지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물자의 수송로, 지식과 학문의 전파, 기술의 전달, 군사 이동로, 상호 간의 정보교환, 재화의 유통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었다.

 

▲ 문경새재길 선비상    



고조선 시대에 왕검성과 연과 제나라와 교류의 흔적인 명도전과 청동제 차여구 및 석노의 출도에서 육상교통로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환인의 졸본성에서 도읍한 이후 환도산성 및 국내성 양 지역 간의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백제는 한성시기에 낙랑과 말갈, 고구려와의 전투를 위해 북방교통로인 자비령, 방원령로, 재령로가 개척되었고, 웅진시기에는 수도의 5부-5항(巷)제 및 지방의 방(方)-군(郡)-성(城)체제로의 개편 과정에서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신라 시대의 도로 역시 소국의 병합과 정복 활동의 과정에서 정비되었다. 신라의 도로 유적은 왕경(王京) 도로와 지방도로로 나뉜다. 왕경 도로는 대표적으로 황룡사지 주변 도로와 분황사 남쪽 동서 도로, 전랑지 서쪽 남북도로, 황남동 북쪽 동서 도로, 월성(月城) 석교 남쪽 남북도로, 황성동 동쪽 남북도로, 남산왕정곡 남북도로, 서부동 남북도로 등이 있다.


고려 시대를 넘어오면서 도성은 산세의 영향으로 서북쪽에 궁궐과 관아가 배치되고 남산을 중심으로 동ㆍ서 경계가 구분되었으며, 오공산-남산-부흥산으로 이어지는 지형 때문에 선의문-십자가-숭인문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경계로 남북 구분 선이 형성되었다. 도성 안에는 국왕의 행차에 필요한 전용 도로인 어가가 조성되었다. 어가는 황성과 외성에 이르는 중심대로 정전에서 시작하여 나성의 성문을 지나 지방으로 연결되었다. 개경 주변으로는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이들은 왕실의 원당(願堂),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라는 본연의 임무는 물론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개경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도 함께 하였다. 왕릉 참배에 따른 도로의 확장ㆍ보수가 활발하였다. 고려의 지방도로는 개경과 도ㆍ부ㆍ목ㆍ군ㆍ현의 치소 간에 중앙과 지방 사이의 왕명이나 군령의 전달, 조세의 수송, 외관 및 사신의 왕래와 같은 목적에 따라서 삼국시대에 조성된 교통로가 점차 확대ㆍ발전된 것이다.


조선 시대의 지방도로는 중앙과 지방 군현의 치소 사이, 군현과 군현 또는 감영, 병영 및 수영 외에 진보 등과의 상호연락과 사행(使行) 및 온행(溫幸) 그리고 물자수송을 위해 정비하였다. 중요 도로망은 9대로(『증보문헌비고』), 10대로(『대동지지』), 6대로(『도로고』)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신경준의 『도로고』에 의한 6대로는 제1로 의주로(경성의 홍제원∼의주), 제2로 경흥로(수유리점∼서수라보)에 이르는 길, 제3로 평해로(망우리현∼평해)에 이르는 길, 제4로 동래로(한강∼부산진)에 이르는 길, 제5로 제주로(동작진∼제주)에 이르는 길, 제6로 강화로(양화도∼강화부)이고, 여기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나타난 봉화로(전곶교-송파진-광주-이천-음죽-단양-풍기-영천-봉화)와 수원별로(노량진-시흥-안양행궁-수원행궁-건릉), 충청수영로(소사점-평택-충청수영), 통영별로(삼례역-전주-남원-오수역-운봉-함양-산청-진주-사천-고성-통영)가 추가되었다.


많은 길은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길은 용도에 따라서, 교통수단에 따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 속에서도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옛길을 찾아내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느끼며 다시 걸을 수 있도록 한 길이 있다. 강원도의 대관령길과 구룡령길, 경상도와 충청도를 이어지는 죽령과 문경새재가 그러하다.

 

▲ 문경새재길 주흘관    



문경새재는 관광지로 잘 알려진 고갯길이다. 진도아리랑의 첫 소절에 “문경 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라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을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문경과 괴산의 연풍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오지의 고개이다. 이 고개는 영남길의 일부분으로 조선 시대 한양과 영남을 잇는 제1대로였던 영남대로에 위치한다. 영남에서 가장 빨리 한양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고, 가장 높은 재이기 때문에 ‘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새도 날아서 넘어가기 힘든 고개, 고갯길 주변에 억새가 많아 억새가 우거진 고개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이 있고,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유래는 ‘새로 낸 고갯길’이 다수의 의견이다.


문경새재는 태종 13년(1413)에 개통되었다. 개통되기 전에는 계립령의 하늘재가 주요 교통로였다. 조령산 마루를 넘는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초점(草岾),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 시대 충청도의 한강 유역과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을 가르는 주된 도로였다. 20세기 초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이화령 고갯길이 만들어지면서 문경새재는 폐도가 되었다.

 

▲ 문경새재길 주흘관 성벽과 수문    



문경새재는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당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 키요마사의 군사와 합류했던 곳이다. 이때 이곳에서 신립 장군이 이들을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을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전후 조정에서 새재에 전쟁 대비 시설이 없는 것에 한탄하였다. 이후 서애 류성룡은 관문을 설치토록 주장하였다. 선조 30년(1597)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일자형의 성을 쌓고 가운데에 문을 세움으로써 조령산성이 처음 축조되었다. 숙종 34년(1708)에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옛 성을 고쳐 쌓고, 중성으로 삼아 관문을 조곡관이라 했다.

 

▲ 문경새재길 조곡관    



새재길은 주변의 산세와 계곡, 숲 등의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유서 깊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고갯길에 대한 설화와 민요가 다양하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는 세 개의 관문이 있는데, 첫 번째 관문은 주흘관이다. 이 관문은 숙종 34년(1708)에 축성한 성문이다.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관문의 누각 정면에는 ‘주흘관(主屹關)’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정면에서 보면 3칸, 측면에서 보면 2칸에 협문이 양쪽으로 달린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홍예문 좌우의 성벽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성벽에는 총안이 있는 성가퀴가 설치되었고, 성벽은 주흘산으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동쪽을 향한 성벽의 아래에는 수구문을 내어 아래로 주흘산에서 흘러내리는 일부의 물이 흘러가도록 하였다. 성벽에 '康熙 辛丑'이라 새겨져 있는데 경종 원년(1721)에 별장 이인성이 개축했다는 내용이다. 그 아랫돌에는 도석수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성의 내측에는 3단의 작은 돌을 쌓아 성을 더욱더 튼튼하게 보완하였다. 누각의 안쪽에는 '嶺南第一關'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성문의 천정에는 구름 속에서 칼을 든 역사가 그려져 있다.

 

▲ 문경새재길 조곡관 성    



두 번째 관문은 조곡관(鳥谷關)으로 임진왜란 2년 후인 1594년(선조 27)에 충주 수문장 신충원이 단독으로 축성한 것으로 중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숙종 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구(舊) 성(城)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제3 관문)과 초곡성(제1 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에 을미의병 때 화재로 폐허가 된 것을 1978년에 누각과 석성을 복원하였다. 복원 후에는 조동문이라 부르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5.8m이고, 대문은  판문이다. 육축 상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익공계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인 문루를 세운 다음, 양 측면 쪽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협문을 2개 세웠다. 홍예문의 천정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성안의 누각에는 '嶺南第二關(영남제2관)'의 현판이 걸렸다. 성문의 좌우 석성의 높이는 4.5m에 이르고 좌우의 산성은 협곡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아 올려졌으며, 길이는 동쪽이 400m, 서쪽이 100m에 이른다. 새재 삼관문  중 가장 먼저 세워진 관문이다.

 

▲ 문경새재길 조령관    



마지막 관문인 조령관은 조선 숙종 34년(1708)에 축성하였으며, 문경새재 고갯마루에 있다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 34년에 축성하였으나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볼 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 정면 3칸, 측면 2칸, 좌우 현문 2개, 팔작지붕이다. 누각 추녀 아래에는 조령관(鳥嶺關)의 현판과 ‘영남제삼관(嶺南第三關)’ 현판이 안과 밖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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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19 [10:21]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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