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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기사입력  2019/11/09 [08:26]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이 말은 버지니아의 식민지의회 의원이면서 변호사였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가 1775년 주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다. 당시 북아메리카 내의 여러 식민지들은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추진하고 있었고, 버지니아 역시 독립혁명에 가담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헨리는 영국과 타협이나 협상을 모색할 때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분연히 일어나 싸워야 할 때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면서 자유가 죽고 사는 문제에 버금갈 만큼 인간에게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문지영, '자유')

 

 여기서 자유는 국가의 모든 통치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대표를 통해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릴 자유를 의미한다. 내가 동의하지 않은 정치적 결정의 영향 하에 놓인다는 것은 노예상태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인식한 정치적 자유를 말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가 주권재민(主權在民)으로 표상되는 인민의 자기통치이므로 우리가 정치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도 일차적으로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방지하는 데 있다. 군주의 자의적 권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항상 나쁜 결과를 초래해서가 아니라 내 운명이 내 의사와 무관하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질고 현명한 군주의 통치는 민주주의보다 더 효율적으로 인민의 이익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운명이 전적으로 군주의 호의와 배려에 달려 있다면 지금 당장의 상황이 내게 유리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근심과 걱정을 거둘 수 없다. 그런 호의가 계속될 지도 불확실하고(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지만 인간의 마음도 갈대와 같다고 하지 않던가!), <통치DNA> 같은 것은 없으니 대대로 훌륭한 군주가 계속 나온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자유의 핵심은 자율성에 있다. 우리가 자유를 꿈꾸는 것도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 자기결정권을 갖기 위해서다.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그런 자율권을 보장하는 정치체제이다. 물론 이때의 자율적 자기결정권은 공동체를 전제로 한 것으로 다른 구성원들의 자유에 대한 고려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춰야 한다. 따라서 사회 밖에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오늘날, 자율권으로서의 자유는 단지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자유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민주주의에 의해 자기통치=자율성이 보장된다고 해서 누구라도 저절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율성은 자유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자의성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조건만이 아니라 자기다움을 느끼고 생각하는 내적 능력이 필요하다. 정치적 속박의 부재만이 아니라 훔볼트와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빌자면, “개체성(individuality)”의 확립이 필요하다.

 

근대 민주주의는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와 같은 외적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다. 민주 사회의 시민은 국가에 종속된 객체나 국가에 의해 동원되는 대상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생각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선 우리가 고유하고 개성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갖고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프롬의 분석에 의하면, 근대인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지만 실제론 <바라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바라는 존재에 가깝다.(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할까.) 예전부터도 자기가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았다. 쉬웠다면, 소크라테스 선생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될 리가 없었을 거다.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아는 것, 그것은 해결하기 가장 곤란한 문제에 속한다. 근대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한다. 프롬의 탄식에 가까운 표현을 빌자면, 자아를 상실한 이런 근대인은 “스스로의 생각을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 사는 자동인간”이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즉 내가 <(남들이) 되도록 기대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내면적 질문은 철학적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로서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프롬에 의하면, <나>란 존재가 <타자가 나에게 바라는 그대로의 것>이라면, 그래서 <남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의 반영(反映)>을 제외하면 자아라고 할 만한 것조차 없다면, 자기 외부의 새롭고 힘센 생각이나 집단의 권위에 기꺼이 동화되려고 한다.

 

외부의(제국/교회/총통/민족 등의) 거대한 권위에 쉽사리 투항하여 자기 것이 아닌 자기를 받아들이는 무력감에 빠질 위험이 있다. 주입된 욕망의 프로그램을 맹목적으로(아니,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로봇이 될 위험이 있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프롬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활동의 가치와 필요성을, 즉 자발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사랑이야말로 자발성의 사례가 아니라 자발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사랑은 자아를 상대 속에 용해시키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를 자발적으로 긍정하며, 개인적 자아의 보존을 바탕으로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역학적 성질은 바로 이런 양면성 속에 있다.”(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을 해봐야 자유를 실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물론 사랑만이 아니라 일도 자발적 활동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이때의 일은 강박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넓게 말하면,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적 활동을 뜻한다. 요컨대 자유를 실현하는 존재가 되려면, 자신의 삶과 사회의 삶을 결정하는 데 자발성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자발성이 단지 선거 때의 투표행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과 일상에서, 또 타인과의 관계에서-특히 ‘인간관계의 꽃 중의 꽃’인 사랑에서 자발성을 실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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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09 [08:2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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