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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할머니의 사랑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기사입력  2019/11/09 [08:21]

 

▲윤영전 (사)평화통일시민연대 이사장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효골에는 ‘잇고개’가 마치 관문처럼 있다. 약간 구불구불한 이 고개를 넘어 학교와 시내를 오갔기에 내게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고개였다. 특히 내 두 할머니와의 아련한 추억이 담겨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두 할머니는 친가와 양가 사이의 동서 간이었다. 양할머니가 18살에 갓 시집을 오셨는데, 양할아버지가 나의 친할머니 친정의 지붕 일을 하시다가 그만 낙상하셔서 병을 얻어 두 달을 사시다가 운명하셨다. 신혼의 단꿈도 접은 양할머니는 자식도 없이 청상(靑孀) 과부가 되시었다.

 

 집안 어른들은 양할머니가 홀로 사시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양반가의 체면에 재가를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희생을 하며 살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양할머니는 15년을 당신의 친정과 시댁을 오가면서 남편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망부(亡夫)에 대한 도리를 다했다. 끝내 개가를 하지 않고 수절한 할머니에게 문중은 당신의 시아주버니의 둘째 아들인 조카를 양자로 결정했다.

 

 할머니는 긴 세월을 기다려 양아들을 맞이했다. 아들을 서당에 보내고 기르며, 바느질과 길쌈을 하여 모은 돈으로 논밭을 사들여 살림을 늘려가니 사는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들이 서당에서 공부를 잘해, 군 백일장에 나갔는데 ‘국화’라는 제목으로 장원하여 자식 둔 재미를 보셨다. 그 아들이 열아홉 살이 되자 혼인을 시키고 그렇게 바라던 손자들을 손수 받으시면서 마치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총애를 하셨다. 손자들이 어머니 젖을 물리고 나면 바로 양할머니의 차지가 되어, 손자 키우는 재미에 세월이 가는 줄을 모르셨다.

 

 할머니가 홀로 된 처음에는 남편의 죽음이 나의 친할머니 때문이라고 원망도 했었지만, 대신 귀한 아들을 양자로 받아 고마운 마음이 되었고, 더구나 손자를 셋이나 낳고 큰 손자는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 군청에 근무해 기쁘기만 했다. 두 할머니는 서로에게 섭섭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움과 기쁨을 안겨 언제나 다정한 모습으로 큰집과 작은집을 왕래하셨다.

 

 이런 두 할머니를 나는 어려서부터 존경했다. 손자들은 무엇이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양할머니, 그 다음이 친할머니였다. 친할머니는 핏줄을 이어 준 할머니요, 양할머니는 나를 헌신적으로 길러주신 분이지만 정(情)은 길러준 양할머니에게 먼저 갔다. 동생에게 어머니의 젖을 빼앗긴 나는 나오지도 않는 할머니의 젖을 빠느라 퍽도 귀찮게 하던 손자였다.

 

 여느 집안에나 있는 일이지만, 우리 집안도 지금까지 형제간에 알게 모르게 시기와 경쟁을 했었다. 처음 경쟁은 집이었다. 큰댁이 넓은 집터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양할머니와 어머니는 샘이 나셨다. “우리도 큰댁과 똑같은 집을 짓고 살자”며 큰 결의를 하듯 말씀을 하셨다. 그러고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집터를 사고, 큰댁을 지은 목수에게 똑같이 일을 맡겨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리 이사한 다음에는 자식번성 경쟁이었다. 아들이 많아야 자식 농사에 성공한 것처럼 여기던 그 때에 두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엿볼 수가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큰집과 우리집 손자녀들이 무려 17명이나 되어 두 할머니는 든든하고 기쁘게 생각하셨다.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양할머니에게 비운이 몰려왔다. 스물두 살의 큰손자가 1949년 3월,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해 아픔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어서 둘째 손자가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셋째인 내가 집안에 알리지도 않고 월남전에 지원하여 두 할머니는 가슴 졸이며 15개월 동안 정화수를 떠놓고 무운장구를 빌어야 했었다.

 

 어느 날 효골 집에 신문사 기자가 한국군 월남 참전을 취재하러 왔었다. ‘혹 손자에게 불행한 소식이 있어서 전하려 온 게 아닌가?’ 깜짝 놀라신 할머니의 모습이 내 사진과 함께 신문사회면에 나기도 했다. 내가 두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월남에서 무사히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올 때도, 두 할머니는 잇고개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셨다. 내가 두 할머니께 엎드려 큰절을 올리니 덩실덩실 춤을 추시며 온 동네를 다니며 “우리 손자가 사지(死地)에서 살아왔다”며 기뻐하셨다.

 

 그 뒤 내가 고향을 떠날 때마다 잇고개를 넘으면, 두 할머니는 이제 가면 언제 오느냐며 아쉬운 작별을 하시곤 했다.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두 할머니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그로부터 수 년 후 이미 팔순을 넘기신 두 할머니는, 잠시 고향을 찾은 손자에게 “서울이 좋다고 하던데 우리도 데려가면 안 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서울에는 두 할머니의 손자녀가 살고 있었기에 서울 한 번 가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감히 노인들을 서울에 모실 수가 없었다.기차를 무려 12시간이나 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지금 같으면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되고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드릴 수 있었을 터인데 두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한 게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문중에서는 양할머니가 65년을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며 양반가의 체면을 살렸다고 열부(烈婦) 표창을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두 어버이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한 효행으로 효자·효부상을 받으셨고 10년 전에는 나와 아내에게도 두 할머니와 부모님을 잘 모셨다하여 효자상과 효부상을 주었다. 한 집안에서 삼대(三代)가 효열(孝烈) 표창을 받은 일은 백 년만인데, 백 년 전에는 고조부모가 효열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 “할머니의 소원(유언)을 말씀해 달라”는 나의 요구에 “소원은 무슨 소원이냐 ”하시고는 도선산 앞에 세워진 고조부모의 효열비(孝烈碑)를 눈여겨보시면서 당신이 생각하신 속마음을 말씀하셨다.

 

 “비록 두 달도 함께 살지 못해 정도 들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할아버지의 묘와 쌍봉분(雙封墳)으로 하고, 여유가 있으면 표식이나 해주면 좋겠다.”는 소박하고 진지한 말씀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을 다짐하면서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지 10년째 되던 해 도선산 자락에 쌍봉분을 만들고 비문을 짓고 내가 직접 글씨를 써서 묘비를 세워 드렸다. 양할머니를 당당히 우리 후손들에게 말할 수 있었고 손자로서는 응당 해드리는 게 도리였다. 그리고 이듬해 생가 할머니에게도 묘비를 세워 드려 손자녀들의 정성을 올렸다.

 

 요즘은 효열 정신이 구시대적 사고라고 치부해 버린다. 나만 잘살면 그만이고 눈앞에 보이는 순간의 만족이 최고라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고가 만연하다. 효열 정신이 퇴색하니 부부의 도리도 무너져 이혼율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가고 있는 것 같다. 부모 형제간에도 갈등이 늘어만 간다. 이 모두가 효열에 대한 정신이 점점 사라져 가서는 아닐지 하는 마음이 나만의 생각일까!

 

 내가 이제 할머니들의 나이에 가까이 들어 느끼는 감정은 시대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두 할머니의 순수하고 정감이 넘치는 그 모습들이 한없이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오직 희생정신으로 자식 사랑과 손자 사랑, 그리고 우애와 양보의 미덕을 끊임없이 몸소 보여준 두 할머니들이었다.

 

 나는 가끔 고향을 찾아서 잇고개에서 두 할머니가가 주신 정다운 내리사랑 모습을 떠올린다. 그저 손자가 무탈하게 잘되기만을 바라시던 두 할머니의 사랑이 한없이 그리워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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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09 [08:21]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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